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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바이오로 열어가는 2035 미래사회- “유전자회로 공정 예측기술” 편
제10화 “그가 천재로 불렸던 이유”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에서 지난 1월에 발표한
'2019 10대 바이오 미래유망기술(클릭)' 에 대해서 10화의 소설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바이오가 열어가는 행복하고 희망찬 미래상 제시를 통해
바이오 미래유망기술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것 보세요. 자꾸 이러실 겁니까. 지난번엔 거기 때문에 기자들 피하느라 출근도 제대로 못 하고 제가 얼마나 난감했는지 압니까. 자꾸 이러시면 더는 거기랑 일하기 어려워요.”
국가생명정보기술원 소속 강현 수석연구원은 환경분야 국제연구진 ‘사이언스피스’의 조아영 책임연구원의 영상통화를 받다가 화가 난 듯이 소리쳤다.
“그때 일은 여러 번 사과드렸잖아요. 제발 부탁인데 이번 일도 신경을 좀 써 주세요.”
사이언스피스는 적은 연구비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안면이 있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현과는 얼마 전 ‘미세플라스틱을 먹이로 삼는 미생물’을 개발하면서 인연이 닿았다. 그 이후 사이언스피스와 국가생명정보기술원은 현을 창구로 삼아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게 됐다. 현은 사이언스피스 측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간혹 너무 과도한 부탁에 피곤을 느끼는 일이 많았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저도 제 연구 일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분야를 연구하시는 건 좋은데, 접근방법은 말씀하신 것과 전혀 달라야 합니다. 다른 분야 전문가가 필요해요. 저희 연구소의 권…. 아, 차라리 국제협업을 해 보시지 그래요. 사이언스피스는 중국 사무소도 있으시다 들었는데.”
“누구 생각나는 사람이라도 있으신가요?”
“중국 생명공학연구소 한 후이징 박사랑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거의 모든 면에서 적임자라고 생각해요.”
“어쩐지 떠넘기시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요.” 조 연구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이런 연구가 꼭 필요하다는 건 인정하고 도울 생각도 있어요. 하지만 저보다 한 박사가 더 잘 어울립니다.” 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현은 천재로 불렸다. 그저 대중의 인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료 과학자들 모두 그를 천재라고 부르기에 서슴지 않았다. 남들은 몇 년씩 난관에 부딪혀 있는 연구도 그가 손을 대면 빠르게 문제가 해결되곤 했다. 생명체의 유전자를 원하는 대로 설계하고 기능을 개선할 수 있으니 사실상 생명과학분야 연구에선 ‘만능 치트키’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그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는 연구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는 축적된 인류의 생명과학지식과 급진전한 인공지능(AI) 기술 덕분에 가능해진 일이다. 과거라면 수없이 많은 생물의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그 유전자 정보를 교정하거나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유전자정보를 만들고, 다시 세포를 배양하고, 그 기능을 확인하는 일을 지겹도록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AI는 가장 효율이 좋은 유전자 구조를 척척 제안해 주고, 이를 다른 AI를 이용해 가상실험을 해 보는 방식으로 시행착오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이 결과 생명과학분야 연구속도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빨라졌다. 물론 이런 일을 하려면 생명과학은 물론 인공지능 시스템까지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어야 했다. 당연히 그런 전문가가 그리 많을 리 없었다. 현은 그 몇 안되는 사람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현은 자기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연구역량이 타인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그에게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이용해 누구보다 빠르게 문제 해결의 원인을 찾아낼 줄 아는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보다 중요한 건 조력자의 역량이었다. 현의 곁에는 같은 연구소 동료이자 지금은 연인으로 발전한 권하선 연구원이 있었다. 생명과학 연구에 인공지능을 동원하려면, 그 분야에 특화된 정보통신기술(ICT)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런 두 사람의 호흡은 꽤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니 현은 다른 전문가들의 연구효율이 자기보다 떨어지는 건, 그저 그들의 옆에 하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현은 하선을 대신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을 갖춘 사람을 최근 꼭 한 사람 만난 적이 있었다. 몇 개월 전 메르스 연구를 함께 하며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 중국 연구팀 한 후이징(휘경) 박사였다. 그녀는 하선처럼 현의 마음에 쏙 드는 데이터를 뽑아내 주고, 필요한 입출력 프로그램을 원하는 때에 쏙쏙 개발해 줄 줄 알았다.
사이언스피스는 최근 ‘유전자회로 공정 예측기술’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동식물의 유전자를 전자회로처럼 인식하고, 그 기능을 예측 해 설계에 반영하는 기술이다. 관련 기술은 과거 십수년 사이 크게 성장했다. 사실 현과 같은 전문가가 등장한 것도 이 분야 지식이 급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과학자들은 이미 10년 전 박테리아 등 세포의 대사경로를 조작해 각종 화학물질, 에너지, 의약품 등을 생산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몇 년 전에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소속 연구자가 ‘화성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을 만들어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이언스피스의 목표는 범용 유전자회로 공정예측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 소프트웨어가 완성된다면 관련분야 전문가 누구나 연구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세계 각지의 연구자들이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얼마나 많은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사이언스피스 입장에선 총력을 걸만한 일이었다. 그 연구를 시작하려는 사이언스피스가 가장 전문가라고 불리는 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런 아영의 요청은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짐짓 현의 입장에선 “당신의 연구 노하우를 담은 AI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무상으로 내 놓으라”는 소리로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영을 비롯한 사이언스피스 연구자들은 ‘올바른 일을 한다’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현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도리어 많은 사람들의 연구 효율이 높아진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깨끗해지고, 더 편리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이 도움을 주려는 방법은 차이가 있었다. 아영의 요구는 현만의 독자적인 노하우와 확보하고 있는 DNA 데이터에 관한 부분이었지만, 현은 하선의 서포트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즉 하선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AI를 제공하면 문제는 해결될 거라고 여겼다. 다만 요즘 정신없이 바쁜 하선의 일정을 고려해, 그와 가장 비슷한 역량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휘경과 상의해 보라고 추천한 것이다.
다음 날. 현은 연구실 허공에 펼쳐져 있는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두 팔을 열심히 휘젓고 있었다. 복잡해진 연구 일정을 정리하느라 수없이 많은 e메일과 파일로 정리하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때마침 화상전화가 들어왔다. 현은 한 손으로 홀로그램 속 e메일 함에 들어와 있는 스팸메일 하나를 집어내 휴지통에 던져 넣으면서, 또 다른 한 손으로 스마트 안경을 집어 얼굴에 쓰면서 답했다.
“응. 왜? 지금 바쁜데 내가 조금 있다가…. 아… 한 박사님이시군요.”
개인 번호로 전화를 할 사람이 많지 않으니 현은 하선이 건 전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화를 건 사람은 중국에 있던 휘경이었다.
“권 박사님이 아니라서 실망하셨나 봐요?” 휘경은 뾰로통해져서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어쩐 일이세요?”
“사이언스피스 측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강 박사님 추천이라고 꼭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 사람들이 왜 저를 찾았는지, 강 박사님은 왜 저한테 이런 일을 하라고 하신건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요.”
휘경이 다시 따지듯 말했다.
“아. 그 이야기인가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연구성과는 대부분 하선 씨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박사님 이외에는 비교할 수 있는 사람조차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하선이나 한 박사님에게 뛰어난 연구 노하우가 있으실 거라고 판단을….”
“휴. 이 양반이 겨우 정리하고 있는 사람 속을 다시 뒤집으시네.”
휘경은 한숨을 쉰 다음 현의 말을 자르며 연이어 말했다.
“강 박사님. 지금 사람에 대한 애정을 AI에게 학습시키라는 건가요?”
“예? 그게 무슨?” 현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권하선 박사님이 그만큼이나 일을 잘 도와드릴 수 있었던 건, 아마 강 박사님의 세세한 습관까지 모두 배려하고 하나하나 애정을 가지고 일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무슨 기술적인 노하우 같은게 아닐거에요.”
“…….”
“그리고, 뭐……, 저도 그랬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몇 날 며칠 밤을 함께 세면서도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 제가 다른 사람과 일을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 AI를 학습시킨다고 해도 그것과 비슷한 결과를 기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예.” 현은 겨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떼려다가 다시 다물고 말았다.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전화를 빨리 끊고 싶어졌어요.” 휘경은 조금 글썽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 정말로 미안합니다.”
“이봐요. 박사님. 끝까지 왜 그래요? 그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시면 된다구요. 권 박사님은 평생 정말 큰 일이네요.” 휘경은 다시 한숨을 쉬고는 삑- 소리와 함께 화면에서 사라졌다.
“나 참. 이런 배 나온 아저씨 어디에 볼 데가 있다고.” 휘경에게 공연히 혼이 나고 어안이 벙벙해졌던 현은 반나절이 지난 다음에야 억울하다는 듯이 겨우 중얼거렸다.
“뭐해요. 야근할거에요? 오늘은 좀 같이 들어가면 안 돼요?” 퇴근 시간이 다 되자 옆 실험실에서 근무하던 하선이 찾아와서 말했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궁금증이 채 풀리지 않은 현은 하선에게 묻기 시작했다.
“왜요? 뭘요?”
“지금까지 열심히 도와줬던 것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선이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거야.”
“뭐예요. 사람 불안하게 왜 그래요?”
“혹시, 내가 하선이 없을 때도 하선이랑 일하는 것처럼 계속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뭐 그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
“응? 자기 어디 가요? 그런 걸 왜 물어봐요?”
“그냥 궁금해져서 그래. 나 어디 안 가.”
“그런 소프트웨어라면 저번에 기념일 날 선물로 만들어 줬잖아요. 그런데 그거 자기밖에 못 쓸걸요. 잘 고치면 다른 사람들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게 사람마다 업무습관이 달라서 세팅 다시 다 해야할텐데….” [2019 바이오미래유망기술의 이야기 - 제1화 “그들만의 1000일 기념일” 참고]
“뭐? 설마 그때 그 소프트웨어가.”
“뭐예요. 아직 한 번 써 보지도 않은거에요?”
“아니. 그때는 그냥 신형 정보입출력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다음에 자기한테 물어보고 쓰려고 놔뒀는데 바쁘다 보니 그만….”
“아유. 진짜 내가 못 살아. 그거 만드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지금 1년이 다 돼가도록…….”
하선은 결국 현의 가슴팍을 때리기 시작했다. 현은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하선을 끌어당겨 말없이 꼭 끌어안았다.
“아 이거 놔요. 오늘 진짜 이상하네. 엉뚱한 걸 물어보질 않나.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지를 않나.”
“아니야. 고마워서 그래. 정말이야. 그리고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는 거라며.”
“그런 건 누가 가르쳐 줬는데요?”
하선이 현의 가슴팍을 때리던 손을 내리고 눈을 흘기며 물었다. 현은 아무 대답 없이 하선을 다시 꼭 끌어안았다.
- The end
글 : 전승민(前, 동아사이언스 기자)
삽화 : 조진호(과학저술가)
감수 : 김하성(한국생명공학연구원)
기획 및 편집 : 김무웅, 남연정(한국생명공학연구원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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