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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동향

[한림원의 창 2024 봄호] 1995-2004년: 한국 기초과학의 탄생

  • 등록일2024-05-31
  • 조회수1462
  • 분류제도동향

 

 

[한림원의 창 2024 봄호] 1995-2004년: 한국 기초과학의 탄생


 

 

◈본문


1980년대는 격동과 파란의 시대였다.


 겉으로는 냉전의 종식이었으나 세계 곳곳에 무력 충돌과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우주왕복선이 발사될 만큼 과학기술은 발전했으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고도 발생했다. 한국은 아직 개발도상국이었다. 기술 개발을 토대로 ‘한강의 기적’을 실현하고, 저금리·저유가·저달러에 힘입어 연평균 12.1% 성장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지만, 정치·사회적으로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등 민주화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해야 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는 국경 없는 세계로 진입하는 시기였다.


소련의 해체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됐고, 유럽은 유로화를 도입했다. 무역과 금융의 글로벌화 가속과 더불어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정보화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대형강입자가속기(LHC) 프로젝트, 국제우주정거장(ISS) 프로젝트 등 대규모 국제 공동연구도 추진됐다. 한국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문화산업이 부흥했고, 경제 위기를 겪긴 했으나 회복과 성장을 거듭함과 동시에 국제무대에서의 역할을 점차 확대해나갔다.


한국 과학기술사도 1990년대 매우 중요한 변곡점을 맞았다. 


1980년대까지의 우리나라 과학기술 연구개발 (R&D) 투자 기조는 ‘기술드라이브 정책’으로 산업기술개발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대내외 급격한 환경 변화로 한국은 더이상 선진산업기술의 단순한 수입·모방·활용에 의존해서는 경제성장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그리고 독자적으로 최초의 원천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자 국가R&D 투자는 필연적으로 대형화·전략화를 지향했으며 이와 동시에 기초 과학이라는 튼튼한 토대 없이는 선진국 도약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기초과학.


산업 발전을 이끄는 응용과학이나 산업기술의 바탕이 되는 학문으로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 관건이 되지만,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투자를 해야만 그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는 분야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대한민국에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제 겨우 한 세대,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한국 기초과학이 탄생한 그 시점으로 돌아가 본다

 

 1990년부터 대학 중심의 기초연구 투자 확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R&D 투자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본격화되었으며, 1960년대부터 30년은 소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로 지칭되었던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응용 및 개발연구가 이루어졌다. 당시 이공계 대학은 해방 이전 태어난 1세대 과학자들이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배우고 돌아와 학문별 토대를 마련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등 교육 기반을 조성하는 데 매진했다. 1970년대까지는 R&D 예산 의 4% 정도만 대학에 투자되었으니 대학에서의 연구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다 1977년 과학기술처에 미국과학재 단(NSF)을 벤치마킹한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이, 1981년 교육부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설립되며 기초연구 지원은 과제 수와 연구비 규모에서 큰 폭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과제당 연구비 규모가 수백만 원 수준이고, 지원 기간이 1~2년에 불과해 장기적 안목의 기초연구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1989년 12월 제정된 「기초과학연구진흥법」은 대학의 연구기능을 크게 강화하여 대학이 기초연구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한국과학기술계를 이끄는 또 하나의 축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박사후연구원제도, 연구교수제도 등 대학에 전문연구인력을 확충하기 위한 제도가 마련되었고, 우수연구집단 지원과제 신설, 연구 시설과 기자재 지원, 기초과학연구지원기관 설립 등선진국 수준의 연구환경을 만들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잇따랐다. ‘기초연구진흥 종합계획’, ‘범부처 기초연구진흥 계획’, ‘이공계 대학 연 구 활성화 계획’, ‘기초과학 연구 진흥 종합계획’ 등 정권의 바뀜에 상관없이 지속해서 기초연구 진흥을 위한 계획은 갱신되어 갔다. 이후 교육부와 과학기술부 모두 대학을 거점으로 하는 대형사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며 대학의 연구인력 양성 기능과 연구결과의 양적·질적 수준이 모두 크게 진보되었다. 먼저 교육부는 교육과 연계된 ‘학술 연구 기반 조성 사업’을 맡아 개인 단위의 사업을 확장하는 한편 대규모 인력 양성 사업도 병행했다. 1994년부터 5년간 교육 중심의 우수 공과 대학 육성에 2,000억 원, 1995년부터 5년간 대학원 육성을 위한 연 구중심 대학에 1,000억 원을 지원했으며, 이는 1999년 「두뇌 한국(Brain Korea) 21 사업」으로 연결되었다. BK21은 연간 2,000억 원씩 7년 간 총 1조 4,0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대학원생에게 장학금과 연구자금을 제공하고, 연구인프라 확충을 지원함으로써 국내 이공계 대학원 교육과 연구의 질을 높이고 학문후속세대를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교육부가 고급 연구인력 양성과 형평성 확보에 집중하는 동안 과기부는 탁월성을 목표로 혁신적 사업을 기획했다. 특히 1990년 도입한 ‘우수연구센터(SRC·ERC, 현 선도연구센 터)’ 사업과 1997년 시작된 ‘창의적 연구진흥사업(현 글로벌 리더연구)’은 많은 연구자들이 우리나라 기초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가장 공헌한 사업으로 꼽는다. 우수연구센터는 당시로는 상당한 금액인 연간 약 10억 원을 9년 동안 장기 지원함에 따라 대학별로 연구 장비 및 환경을 갖추고 우수한 연구 집단을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023년까지 SRC는 130 개, ERC는 149개가 선정 및 운영되었으며 이후 MRC(기초의과학), CRC(융합) 등으로 확장되었다. 창의적 연구진흥사업은 세계 수준의 과학기술자 육성을 목표로 동일 과제에 대해 최장 9년간 연 5~8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함으로써 연구자 들이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연구단장에게 연구비 사용과 연구원 채용 등 운영에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했다. 이후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핵심 기술 분야의 우수 연구실을 만들기 위해 1999년부터 시행한 ‘국가지정연구실(NRL)’은 연구실당 연간 2~3억 원을 5년간 지원하며 중견 연구자들의 도약을 뒷받침했고, 2003년부터는 ‘젊은 과학자 연구 활동 지원사업’을 시작하여 신진연구 자들에게 연구비와 시설·장비 비용을 지원하는 등 정부의 기초연구 지원체계를 지속해서 발전시켜갔다. 한편 같은 시기 대학에서도 교육의 질과 운영의 합리성을 높이기 위해 자체적인 제도 개선을 이루었다. 1991년부터 연구처를 설립하여 연구비 중앙 관리를 도입했고, 1992년부터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학과 평가 인정제, 대학 종합평가 인정제 및 교수 업적 평가제 등이 도입되며 과학인용색인(SCI) 논문 실적이 연구성과 및 수월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항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연구비 사용에 대한 투명성을 높이고 연구성과의 양과 질 모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1981년 274편에 불과했던 SCI 논문 수는 2001년 17,583편으로 대폭 늘었으며, 2000년대에 들어 분야별 피인용횟수가 상위 10%에 드는 논문도 다수 발표되었다. 다만 기초연구 투자 초창기 진행된 연구행정의 체계화 및 수치에 기반한 업적평가는 연구자들의 행정 부담을 늘리고 대학교원들의 논문 편수 늘리기 무한 경쟁을 야기하는 등의 부작용도 낳았다. 이는 2000년대 초부터 문제점으로 지 적되어 현재까지도 기초연구에 걸맞은 연구지원과 성과 평가를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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